코타키나발루는 우리 가족이 두 번이나 다녀온 여행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 모두, 아이 컨디션이 아주 편한 시기는 아니었다.
자극에 예민했고, 낯선 환경이 힘들 수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여행 전에는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컸다.
비행기는 괜찮을까.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낯선 숙소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음식은 먹을 수 있을까.
사람 많은 곳에서 갑자기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지.
발달장애 아이와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부모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수십 번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지친다.
그런데도 우리는 코타키나발루를 두 번이나 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가족에게 이곳은 꽤 안전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멋진 여행이라기보다, 버틸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웃음이 나는 사진들이 많다.
커다란 접시 위에 산처럼 쌓인 음식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이걸 우리가 다 먹을 수 있나?” 싶을 만큼 압도적인 비주얼이었다.
낯선 향과 낯선 식당,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까지.
아이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자극이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순간 하나하나가 걱정이었다.
아이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을지, 소리가 싫지는 않을지,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계속 살피게 된다.
그런데 여행을 몇 번 해보니 알게 됐다.
발달장애 아이와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을 지나가는 것.
힘들면 쉬고, 괜찮으면 조금 더 해보고, 안 되면 돌아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관련 글 > “우리 아이는 아직도 엄마, 아빠를 말하지 못한다“)



코타키나발루가 우리 가족에게 편했던 이유
코타키나발루가 좋았던 이유는 관광지가 엄청 많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무리해서 여기저기 다니지 않아도 여행이 됐다.
숙소에서 쉬다가 수영장에 가고, 컨디션이 괜찮으면 바다를 보러 가고, 해가 질 무렵에는 선셋을 보러 나가면 됐다.
힘들면 다시 숙소로 돌아오면 됐다.
그 단순함이 좋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코타키나발루의 밤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말레이시아, 특히 코타키나발루는 내가 다닌 동선 기준으로 술집이나 유흥가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점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물론 아예 술집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이들과 다녔던 곳에서는 시끄러운 취객이나 과한 호객행위, 큰 음악소리 같은 부담이 적었다.
발달장애 아이와 여행할 때는 이런 게 생각보다 크다.
일반 여행자에게 안전하다는 말은 치안이나 사고 위험을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 같은 가족에게 안전하다는 말은 조금 다르다.
아이가 갑자기 힘들어해도 빠져나올 수 있는지.
밤에 잠깐 걸어도 분위기가 부담스럽지 않은지.
부모가 계속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지.
주변 자극이 아이를 무너뜨리지 않는지.
그런 기준에서 코타키나발루는 우리 가족에게 꽤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다.
덥다.
정말 덥다.
잠깐만 걸어도 땀이 나고, 아이 컨디션을 생각하면 낮에는 일정을 많이 넣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숙소와 수영장 중심으로 움직이게 됐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우리 가족에게 더 맞았다.




첫째가 드디어 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오래 바라본 사진은 수영장 사진이었다.
첫째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흔한 수영장 사진일 수 있다.
아이들이 여행 가서 수영장에 들어가 노는 사진.
휴양지에 가면 누구나 한 장쯤 찍는 그런 사진.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는 조금 달랐다.
첫째는 예전부터 물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아이가 아니었다.
바다나 수영장을 멀리서 보는 것은 괜찮아도, 직접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이 몸에 닿는 느낌, 깊이에 대한 불안, 주변 소리,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모두 자극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가 어느 순간 물 안에 들어가 있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물속에서 웃고 있었다.
아빠 손을 잡고 몸을 맡겨보기도 했다.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들어갔다.
그게 중요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여행이 아이를 갑자기 바꾸는 것은 아니구나.
하지만 아이가 세상을 만나는 기회를 조금씩 만들어주는 것은 맞구나.
(관련 글 > “무발화 발달장애 아이를 10년 키우며 알게 된 것“)
해외여행은 치료가 아니라 경험의 확장이었다
나는 여행을 치료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아이가 갑자기 말을 하게 된 것도 아니고, 감각 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여행 한 번으로 발달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하지만 분명히 남는 것은 있었다.
아이는 낯선 공항을 경험했다.
비행기 소리와 사람 많은 공간을 견뎠다.
다른 침대에서 잠을 잤다.
낯선 식당과 냄새를 마주했다.
수영장과 바다를 자기 속도로 받아들였다.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나오는 경험을 했다.
이게 발달장애 아이에게는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세상과 만나는 연습이었다.
실제로 장애 아동 가족 여행과 관련된 연구들을 보면, 이런 여행은 가족에게 추억과 유대감을 만들어주고 아이에게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는 기회를 줄 수 있지만, 동시에 준비 과정과 현장 상황에서 부모의 스트레스와 불안도 크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행은 무조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무조건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다. 준비와 조절이 필요하지만, 잘 맞는 방식으로 시도하면 가족 전체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
출처 : Eusébio, C., Carneiro, M. J., & Brandão, F. (2024).
The journey within the journey: How traveling with special needs children affects families.
INVTUR Conference 2024, University of Aveiro, Portugal.
내가 느낀 것도 비슷했다.
우리 아이가 여행 뒤에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보는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우리 아이는 이런 곳은 어려울 거야”에서
“준비하면 우리도 갈 수 있구나”로 조금 바뀌었다.
그 변화가 나에게는 컸다.
말은 못해도, 아이는 여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첫째는 아직 말로 많은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뒤, 아이는 집에서 캐리어를 꺼내오기 시작했다.
말은 못하지만,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또 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그 설렘을, 아이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말을 못한다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표현이 서툴다고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자기 방식으로 기억하고, 자기 방식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또 한 번 배웠다.
부모가 알아듣지 못할 뿐, 아이는 계속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련 글 > “발달장애 아이와 오사카 자유여행, 그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장애인 패스 이용 후기“)



그래도 여행은 늘 쉽지 않았다
물론 사진 속 장면만 보면 모든 순간이 아름다워 보인다.
노을은 멋졌고, 수영장은 시원했고, 아이는 웃고 있었다.
동물을 바라보는 모습도 좋았고, 바다 옆에서 찍은 사진도 좋았다.
하지만 실제 여행은 사진보다 훨씬 복잡했다.
중간중간 아이가 힘들어하는 순간도 있었다.
안아서 이동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고,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겨서 한숨이 나오는 순간도 있었다.
사진첩에는 예쁜 노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숙소 바닥을 찍어둔 현실적인 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래, 이게 진짜 우리 여행이지.
발달장애 아이와의 여행은 예쁜 장면만 모아놓은 여행이 아니다.
좋았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이 같이 있다.
웃는 사진 뒤에는 부모의 긴장과 계산과 포기가 숨어 있다.
그래도 우리는 갔다.
그리고 다시 갔다.
그게 우리 가족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많이 보는 것보다, 무너지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예전에는 여행을 가면 뭔가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곳도 가야 하고, 맛집도 가야 하고, 일정표에 적어둔 곳은 최대한 다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여행을 제대로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발달장애 아이와 여행하면서 기준이 바뀌었다.
많이 보는 것보다 아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계획대로 다 하는 것보다, 가족이 웃으며 하루를 마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관광지를 하나 더 가는 것보다, 아이가 수영장에서 30분 즐겁게 노는 것이 더 큰 일이었다.
코타키나발루는 그런 여행이 가능했던 곳이었다.
아침에 무리하지 않아도 됐다.
낮에는 더우면 쉬면 됐다.
수영장에서 놀다가 지치면 방으로 들어가면 됐다.
저녁에는 선셋을 보러 나가고, 밤에는 조용히 산책하면 됐다.
그 단순한 하루가 우리 가족에게는 꽤 괜찮았다.
우리 가족에게 코타키나발루가 남긴 것
코타키나발루 여행이 우리 아이를 갑자기 바꿔 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분명한 변화를 남겼다.
아이는 낯선 곳에서도 하루를 보내는 경험을 했다.
물에 들어가보는 경험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녀오는 기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캐리어를 꺼내오며, 자기 방식으로 “또 가고 싶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발달장애 아이와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할 것도 많고, 걱정할 것도 많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계속 아이 컨디션을 살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조금 알게 됐다.
발달장애 아이에게 여행은 치료가 아니다.
대단한 변화 프로그램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세상을 조금씩 넓혀가는 경험은 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에게도 여행은 의미가 있다.
우리 아이도 낯선 곳에서 완전히 무너지지만은 않는구나.
부모가 준비하면 아이와 해외도 갈 수 있구나.
무리하지 않는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도 가능하구나.
코타키나발루는 우리 가족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곳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두 번이나 갔다.
화려해서가 아니라,
많이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한걸음.
이번에도 우리는 그렇게 조금 더 멀리 다녀왔다.
현실적인 정리
발달장애 아이와 해외여행을 준비한다면, 나는 여행지를 고를 때 관광지 개수보다 아이와 가족이 쉴 수 있는 구조인지를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숙소에서 수영장이나 바다 접근이 쉬운지,
힘들 때 바로 쉴 수 있는지,
밤 분위기가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지,
일정을 많이 넣지 않아도 여행이 되는 곳인지,
그리고 부모가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지.
우리 가족에게 코타키나발루는 그 조건에 꽤 잘 맞는 곳이었다.
물론 덥고, 모든 순간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예민했던 시기에도 두 번이나 다시 갈 수 있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는 충분히 괜찮은 여행지였다.
오늘도 한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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